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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틈을 엿보는 ‘나’의 그림」

   

(...) 우리는 알지만 모른 척

누구는 움직이고 누구는 제자리에 있다

- 작가 노트

 

나방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궤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될까. 실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건 동시에 강건의 개인전 《헤테로세라》를 풀어쓰기 위해 내가 어떤 말에 의지할지, 만약 그 말이 작업 자체를 포괄할 수 없거나, 작업에 앞서 지나치게 투명해질지도 모른다는 의심, 어느 정도 부연된 말들 속에서 다시 작업의 중심을 봐야만 할 때 자꾸만 흐려지는 초점 안팎으로 부유하는 언어의 곤궁함을 대변한다. 언어는 곤궁하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로선 ‘그것’이 전부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주변 어디서나 작업을 포함한 실체가 언어에 맞설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진다는 점에서.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생각보다 자주, 자신이 주변에 휘몰아치는 난폭한 습성으로 말미암아 저 혼자서 곤궁해진다. 이를테면 강건의 작업과 무관하게 (작가의 주된 매체는 회화라는 점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후술해야만 하는 상황과 맞닥뜨린 누군가, 나와 닮은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진 실체, 중심 같은 것을 바로 세우길 포기한 채, 그저 퍼포먼스에 대한 기억을 자기 언어로 (언제나 뒤늦게) 소묘할 뿐이고, 그 과정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것, 사방으로 기울어지는 것, 실체 없는 언어의 잔해들, 이 모든 건 언어적인 퍼포먼스다.

 

그 이후로 반복될 법한 유희를 순전히 언어로 해결하고 싶진 않다. 중요한 건 강건의 작업, 즉 사포로 문지른 종이 위에 새긴 각진 굴곡들이 각각의 회화로 표면화된 결과, 내가 오로지 ‘그것’만을 끈질기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고, 덕분에 양자 사이엔 작업 자체로 해명될 수 없는, 어쩌면 작업과 논외처럼 비칠 수도 있는 사적인 내러티브, 작가만이 온전히 되먹임할 수 있는 말들이, (지금 시점에서) 그로부터 시간이 지났기에 한층 물러진 질감으로, 무너진 가교처럼 자신을 겨우 지탱하고 있다. “나방”이 작가의 모친과 나눴다고 짐작되는, 유년기에 가까운 기억 속에서 불거진 하나이자 다수인 상징이라고 했을 때, 주지하듯 이때 상징으로서의 말은 생각보다 난폭하고, 그래서 주변에 휘몰아치며, 그 와중에 모든 것들 사이에 인과적이고 단일한 개연성을 서둘러 부여한다. 달리 말해 이 전시에서 나방을, 혹은 그것만을 따라가는 건, 어느새 늙고 병든 엄마를 병원 안팎에서 돌보는 ‘보호자’의 수기처럼 이 전시의 궤적을 짓겠다는 의미다. 그래도 되는가? 와 같은 질문은 윤리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엄마는 스스로 이렇게 재현되길 원하는가? 이제와서 굳이 윤리를 말하는 이유는, 일련의 작업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괴물성의 이미지가 담보로 삼는 ‘대상’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일러주기를, 어느날 응급실의 풍경은 당사자가 체감하는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정적이었고, 고르지 않은 대기줄에 늘어선 엄마 같은 환자들의 체념 어린 표정과 자세가 자신을 더더욱 누그러지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와 같은 정적인 풍경은, 환자들이 서로 은밀하게 공유하는 불안감이 갈수록 ‘물리적으로’ 불어난 나머지, 주변의 공간과 그 안에 속한 개개인들은 ‘그것’에 저항할 수 없음, 한 개인으로서 짊어지길 포기함, 그래서 엇비슷한 방식으로 체념을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본 전시에서 강건의 회화가 본질적으로 초상일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는 프레임 속 산발에 가깝게 그어진 에스키스의 면면에서 엄마를 들춰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암과 같은 질병에 사로잡힌 몸, 특히나 그것이 엄마인 동시에 여성으로 현실에서 구체화됐을 때, ‘그것’을 현실 안팎에서 대상화하는 (암묵적인) 시선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열거한 질문을 고쳐 쓸 수 있다. 엄마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혹은 그것을 거슬러 ‘나’를 괴물성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와 여성은 얼마나 동의어일 수 있는가? 지금도 여전히 병들어 있는 몸은 엄마의 것인가, 엄마가 환자복과 함께 벗어둔 듯한 늙은 여성의 것, 만약 그게 한갓 껍질에 불과하다면, 껍질은 섹슈얼한가?

 

껍질로서의 몸, 쪼글쪼글하지만 여전히 (작가의 시점에서) 낯선 살로 뭉쳐진, 의도치 않게 그렇기 보이는 여성의 둔부와 가슴, 그 외에도 대기줄처럼 무분별하게 열거될 수 있는 여성성의 기호들을 제외한 ‘엄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기 중에서 ‘잘못된 상상’처럼 부풀고, 체념 어린 몸과 얼굴들 위로 더께처럼 쌓이면서, 여기, 즉 응급실 안팎에서 질병이라는 단일한, 단일하기 때문에 인파의 복잡한 지형도를 문지르며 갈수록 추상화되는 상징으로 수렴되는 (엄마를 포함한) 환자 개개인들에게 묘한 활기를 부여한다. 혹은 작가가 그렇게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푸코적 의미에서 질병으로 의식화된 수인이 아니다. 판옵티콘에 가깝게 작동하는 작가의 시선은, 환자들의 군상을 질병으로 요동치는, 그래서 우연찮은 순간마다 ‘나’에게 낯설고 기묘한 살갗을 드러내는 섹슈얼한 몸으로 되비추면서, 역으로 시선의 주체가 자신의 윤리성을 심문하게끔 감시한다. 체념이 물든 몸은 질병 앞에서 ‘물리적으로’ 헐벗을 수밖에 없을 때, 혹은 그 순간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서로의 몸에 엉겨 붙을 수도 있는 섹슈얼리티, 이를테면 서로를 성적으로 매혹하기 위한 관음의 눈빛을 체념하고, 그래서 둔감해진 지 오래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환자와 동일시되지 않는 ‘보호자’이고, 무엇보다 시스젠더 남성으로서 엄마를 위한 돌봄을 구실로 주변을 힐긋거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처벌을 유예한다.

 

결과적으로 “나방” 이후와 처벌 이전의 시/공간 속에서, 혹은 후자가 ‘엄마’와의 원초적이고, 그래서 얼마간 낭만화된 기억을 침해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때 ‘보호자’의 수기를 단초로 삼았던 전시의 맥락은 자기 처벌을 암시하는 자해의 흔적들에 이끌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사포질로 마름질한 종이는, 무수한 실금, 즉 에스키스의 선들로 그어지기 위한 매끄러운 표면이고, 그런 선들은 작가에 의해 미리 정해진 굴곡 내지는 경로를 따라가다 이따금 이탈하기 마련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은 (실제 자해와 마찬가지로) 무작위한 동시에 자신이 죽음으로 치밀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만 엄격하게 통제돼 있다. 일련의 회화가 여전히 본질적으로 초상이라면, 이제 그 이유는 ‘엄마’의 몸을 들춰보려는 대상화의 시선, 혹은 그 시선 자체에 감응하는 패티시즘적 주체인 ‘나’에 대한 은유로서, 그림이자 자해의 흔적으로 남은 불확실한, 도처로 산발할 듯한 괴물성의 이미지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괴물은 ‘나’를 무/의식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내세운, 자기 처벌로 말미암아 불안에 떠는 ‘나’의 심상이자 대리물인 셈이다. 이때의 불안감은 응급실의 풍경에서와 달리 주변과 공유되지도, 그로 인해 주변 공간을 정적인 체념 속에서 짐짓 고요하게 연대할 수 있는 ‘애도의 장소’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연출된 장면은 지나갔고, 다만 그 자리에서 모두가 헐벗는 중이다.

 

‘보호자’이자 외부인으로서 병원의 내적 공간과 친밀해질수록, 개별 병실은 일종의 다크룸으로 돌변하고, 그곳의 문을 여닫는 사람들, 이미 그곳에서 헐벗은 누군가는 질병이 초래한 고통 속에서, 무엇보다 죽음을 암시하는 여운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그럼에도 ‘나’로 인해 유혹되고 유혹당하는 시선의 이해관계를 장악한 채, 내가 당사자로서 체감할 수 없는 질병보다 노골적으로 ‘나’의 욕망을 풀어헤친다. 비록 ‘나’는 ‘그들’과 다르게 정갈하게 옷의 매무새를 고치고 있더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강건이 “괴물성의 이미지”를 프레임 바깥에서, 즉 조각의 몸을 빌어 뒤늦게 여기에 바로 세운 (조각) 작업들은, 자해의 날선 감각과는 달리 얇은 라텍스처럼 흐물거리고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풀 죽어 보인다. 그 순간의 질감은 “껍질”을 다시 현실로 데려왔을 때, 즉 자기 욕망의 부조리함을 억지로 걷어낸 여분의 공간, 객관적인 언어와 기호들의 체계와 “껍질”을 맞세울 때, 대뜸 중력에 사로잡힌 채 저절로 바닥으로 기우는 약하고 병든 몸, 직유로서의 껍질을 상기시킨다. 이제 ‘그들’과의 난교는 끝난 걸까? 그러나 아직 누구도 죽지 않았고, 작가는 지금 이후에도 언제든지 엄마와 동행한 채, 병원으로, 그 속의 보다 내밀한 공간으로 이끌릴 것이다. 그곳의 관점에서, 나방은 패티시와 갈라서는 무해한 환상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성적으로 물화된, 이를테면 다크룸에 들어서기 위한 착장의 기호이자 액세서리에 가깝다. 그렇게 애초에 작업을 둘러싸고 있던 말들은, 지금 나의 언어를 매개로 성적인 추문이자 잡담, 문틈 사이로 헐떡대는 자기 파괴적인 실루엣으로 변질된다.

 

 

 

 

​권시우 _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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